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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링 침묵 기도


현대인을 위한 관상기도의 지침서




센터링 침묵기도는 새로운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니다. 이 기도는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이 알고 체험한 것으로 논리적 기도와 정감적 기도에서 관상기도의 단계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기도이다. 이것은 기독교 관상기도 전통과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의 깊은 기도를 거의 500년 이상 가르치지 않았으며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만 전념하는 영적 엘리트들만이 하는 기도로 이해해 왔다.

센터링 침묵기도는 관상으로 인도하는 전통적 기도의 부활이며, 전통적 관상기도를 현대적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이 기도 방법은 자신의 영혼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센터링 침묵기도는 내적 고요함을 만들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며 초점을 맞추고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도록 돕는 수련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센터링 침묵기도는 관상기도가 아니라 관상으로 들어가도록 준비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의미로 본다면 센터링 침묵기도는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단계이므로 관상기도라고 볼 수 있다.

저자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센터링 침묵기도의 방법을 현대 심리학적 모델과 기독교의 전통적 영적 여정과의 대화를 통해 발전시켰다. 전통적 영적 여정은 영적 발달 단계라고도 말하는데 많은 영성가들이 그 길을 갔으며 가르쳤다. 즉 정화, 조명, 일치의 길이다. 이것이 현대인들에게는 감이 멀고 소통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키팅은 이것을 현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상처, 치유, 회복이라는 현대 심리학의 패러다임으로 소개하고 있다. 키팅은 초대 교부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전통적인 기독교 지혜와 현대 영성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선구자인 켄 윌버(Ken Wilber), 마이클 워시번(Michael Washburn), 발달 심리학자인 피아제(Jean Piaget)의 통찰력과 이론을 잘 통합하여 센터링 침묵기도를 설명하면서 영적 여정을 상처, 치유, 회복의 길인 심리적/영적 패러다임(psycho-spiritual paradigm)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센터링 침묵기도를 하나님의 테라피(Divine Therapy)로 소개한다.

최근 심리학자들에 의해 센터링 침묵 수련 후에 사람들은 더 많은 하나님 사랑과 현존을 경험했고, 더 많은 평화를 얻었으며, 심리 치유에서 다루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치유되고 심리적으로 성장했으며, 그들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주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필자 자신도 많은 치유와 영적 인격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필자가 그동안 센터링 침묵기도를 나누면서 함께 수련하는 사람들로부터 역시 자신들의 삶 속에 많은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

키팅은 이와 같은 심리적 과정을 우리 영혼의어둔 밤전통적 아포패틱의 영성(Apophatic spirituality), 부정의 영성, 혹은 무념적 영성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사고, 말, 느낌과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인 무지의 구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 일생의 정서적 상처가 치유, 정화된다는 것이다. 센터링 침묵기도를 할 때 이 상처들이 점점 우리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려놓게 됨으로 점점 거짓 자아는 약화되고 참 자아가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한다. 키팅은 이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화되는 변형의 일치(transforming union)로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영성가들은 관상기도를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필수적인 기도로 소개한다. 아돌프 탠쿼리(Adolphe Tanquerey)는 “관상기도는 많은 빛, 많은 사랑, 많은 성령의 열매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를 완전에 이르는 왕도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갖는 관상기도를 정기적으로 시간을 따로 내어 해야 하며 하나님 현존을 알아차리기 위한 어떤 다른 지름길은 없다고 필자는 믿는다.

사막의 교부와 교모들(desert fathers and mothers)은 영적 완전의 상태를 아파세이아(apatheia)라고 했다. 이는 거짓 자아의 정서적 강박의 짐에서 벗어난 영적 자유의 상태이다. 이와 같이 관상기도는 아파세이아로 인도하며,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회심한 후 성화를 향해 가야 할 목표이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도 역시 기도에 관하여 Praktikos에서 아파세이아는 아가페(agape), 무조건적 사랑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역사하심에 대한 열망은 관상의 차원으로 양육된다. 성화의 여정은 우리의 의식적인 결단이 아니라 내적 과정을 통해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에바그리우스는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영적인 깊은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성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이런 영적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은 다시 길을 잃어버리고 다른 종교적 영성을 찾아 방황할 것이다. 특별히 이 시대는 센터링 침묵기도와 같은 관상기도 차원의 영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센터링 침묵기도와 같은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영성이 형성된 목회자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교회를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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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기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단어는 그 단어가 본래 함축하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것을 말했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로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어떤 신비(Mystery)를 지목하여 가리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언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저 그 신비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잘못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이미 여기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 가운데에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궁극적 실재에 보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예수가 그의 가르침 속에서 표현했던 확증과 도전이다. 그가 가르침을 시작했을 때 말한 첫 번째 말씀은 “회개하라”(마 4:17)이다. 이 말씀은 죄를 뉘우치는 수련이나 외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을 전환하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명백하게 우리의 현재 삶의 방향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이끌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을 발견하게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은 진정 “물질이 아닌”(no thing) 존재 자체로서의 궁극적 실재와 친밀해지기 위한 그리스도의 프로그램이다. “물질이 아님”(no thing)은 특정한 것도, 개념이나 느낌도, 육체적 경험도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저 그 어떤 한계도 갖지 않으신 존재이다(just is). 그리고 이러한 “있음”(Is-ness)과 연결되는 방법은 또한 그저 있는(be)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도 그러하듯이 하나님과도 많은 교제의 차원과 관계들이 존재한다. 마치 “지금 나를 재워주세요”라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어른들에게 마음을 열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아주 친밀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진실한 기도에 기뻐하시면서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보다 발전해서 우리의 기도가 어린아이처럼 그저 밤을 잘 지내기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과 같다.



제3장 누룩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이 가르침을 더 잘 설명해 준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 13:20-21).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 명절을 기념했을 때, 그들은 누룩을 넣은 빵 먹는 것을 금하였다. 심지어는 유월절 기간 내에 그것을 집 안에 둘 수도 없었다. 그 사회에서 누룩은 윤리적 타락의 상징이었다. 누룩은 빵 조각을 어둡고 습기가 있는 곳에 놓고 그것이 썩어서 악취가 날 때까지 둠으로써 생기는 효소이다. 그러므로 누룩으로 발효된 빵은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일상생활과 같은 것들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대략 4세에서 8세까지의 사회화 기간 동안 부모와 교사가 가르쳐준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개념들을 예전에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이 비유의 전체적인 함의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서 그것들을 다시 짚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신다.
2. 하나님은 무한히 정의롭고 선한 이들에게는 보상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신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신실하게 기도하고 그의 계명들을 잘 지켜 갈 때 우리를 보호하신다.
4.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에 대해 참회하는 고행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5.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모든 쾌락을 부정하도록 요구하신다.




제7장 하나님과 춤을


영적 여정의 길을 가면서 전에 의지해 왔던 인간적 버팀목들이 사라질 때, 이 “사라짐”의 경험은 때때로 심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만찬 참여, 예전(ritual)의 참여, 선행의 실천, 성경 읽기, 그리고 헌신해 온 사역들이 모두 무미건조해지고 죽음과도 같으며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철저한 실패자가 되었다는 것만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감각적이고 영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순수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하고 격려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믿음이 정화되면서는 초기에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필수적이었던 예전, 기도의 형식, 영적 독서와 같은 영성수련들이 거의 도움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최상의 볼륨 댄스를 추는 커플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스텝이 완벽하게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동시에 빠르게 돌고, 멈추기도 하고,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그들의 몸은 매우 가깝게 서로 엮여 있어서 당신은 그들이 퍼즐의 조각들처럼 서로에게 묶여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댄스 파트너이다. 그리고 우리를 춤의 움직임과도 같은 매일의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에 응답하도록 초대하신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들, 즉 걷기, 앉기, 숨쉬기, 말하기, 일하기, 놀기, 먹기, 잠자기 등은 하나님과 춤추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 함께 공동으로 춤을 만들어 낸다. 창조주는 춤의 리더가 되어 우리와 공유하기를 원하는 각 움직임의 시간과 장소, 속도를 정한다.

하나님과 함께 추는 춤은 바울이 기록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시 회상해 보면,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장). 당신은 이 본문으로부터 파트너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끄시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모든 행동은 완벽하게 안무가 짜인 듯하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너무 평범해서, 그 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는 마땅히 있어야할 것들과 아주 잘 조화되기 때문에, 신앙의 눈을 가진 이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 없다.



제12장 하나님의 테라피란 무엇인가?


거짓 자아는 두 개의 근본적인 기둥 위에 서 있다. 그 하나는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에 투자된 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다가가거나 우리가 소속된 특정한 그룹에 대해 과잉 동일시하는 경향성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가족이나 관습 혹은 더 큰 공동체에 의해 이미 입력된 가치들을 수용하도록 특정한 사회 계층화가 이루어져 왔다. 누구도 이에 굴복하지 않으면 그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소속된 특정한 그룹에 과잉 동일시하는 문화적 속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년의 위기가 오면, 일반적으로 그들의 가족들은 유동적인 상태가 된다. 자녀들은 출가하고 부부들만 살게 된다. 이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시기이며, 두 번째 새로운 다른 직업을 시작하거나 인생의 목적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품게 되는 시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은 문화의 상징으로서 표현된 그들의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 속에서 그들이 소망하고 기대하던 바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이다.

하나님의 테라피의 목적은 우리의 진정한 형상을 다시 회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되는 것을 겁낼지도 모른다.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 목숨(자신의 거짓 자아)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거짓 자아는 미래가 없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참 자아는 영적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친구들, 친척들, 재산이나 지위뿐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감정들, 생각들, 그리고 내면 깊은 곳 자아와의 과잉 동일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우리의 과장된 욕망들을 수정(moderate)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테라피는 우리가 유전적, 기질적 요인들과 성격과 환경에 따라 이 치유 과정을 타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엄청난 하나님의 지혜는 무조건적이고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이러한 치유를 반드시 가져올 사랑을 가지고 이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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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개종시킨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인물을 사용했다. 이 인물의 정체를 밝히려는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시우스라는 역사적 인물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길고 중요한 저서인 『하나님의 이름들』(The Divine Names)은 1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그 후, 간략하면서도 강력한 『신비 신학』(The Mystical Theology)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으로 유명해졌다. 『교회의 위계』(The Ecclesiastical Hierarchy)는 교회의 예전과 직무가 신비적 해석 과정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천상의 위계』(The Celestial Hierarchy)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데 있어서 천사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하려면 아홉 계급에 대한 성서의 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다.

현재 남아 있는 열개의 편지들은 논문들 안에서 항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상호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를 나타내는 외적인 것들과 예전(ritual)들에 충실하다고 해도, 관상(the contemplative)의 차원을 거부하는 것은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상의 차원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핵심이며 영혼이기 때문이다. 관상은 보다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가 아바(Abba) 아버지(궁극적 실재)에 대해 가졌던 경험이다. 성만찬, 예전, 교리와 금욕적 실천들, 목회, 자비 행위,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들은 모두 이 경험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데, 예수가 “은밀한 중의 기도”(마 6:6 참조)라고 부른 것이 그 경험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privileged) 방법이다. 이 수련이 후에 기독교 전통에서 “관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센터링 침묵기도는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the Fathers and Mothers of the Desert)이 해석하고, 4세기 존 카시안(John Cassian)이 기록했던 고대 관상기도 수련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관상기도이다. 카시안은 이러한 가르침을 서방에 심은 사람이다. 6세기에 관상적 전통에 의해 생겨난 성 베네딕트 규칙과 수도원 직제 안에 그 가르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기도가 다시 부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인은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으므로 수도사들이나 일반 기독교인들 누구나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공히 주어졌다.


역자는 Centering Prayer를 센터링 침묵기도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가톨릭에서는 향심기도, 개신교회에서는 일부 집중기도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만족할만한 제목이 없다. 그냥 센터링 프레어, 또는 센터링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분심, 마음의 흔들림은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순간적으로 우주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다른 데 가 있는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어찌 여자의 마음만 갈대와 같은 것일까!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은 그러한진데...

인간의 마음을 꿀을 바삐 나르는 벌, 코끼리 코, 이 가지 저 가지를 뛰어 다니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원숭이 등으로 비유한다. 흔들리는 코끼리의 코에 공을 쥐어주면 코는 멈춘다. 바로 이 공의 역할을 “거룩한 단어”가 한다. 분심(分心)을 한 곳으로 모아 명경지수를 얻기 위해서 거룩한 단어(sacred word)를 마음 안으로 센터링한다. 마치 축구의 윙 포지션에 잇는 선수가 골대를 향해 센터링하듯이… 이것을 센터링 프레어, 역자에 의하면 “센터링 침묵기도”이다.

이 기도는 불가(佛家)의 선(禪) 수행법과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겠지만,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진틀은 같다고 해도, 그 안에 걸린 그림이 다르면 모두가 다르다. 여느 종교의 수행법을 사진 액자에 비유한다면, 각 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혼과 정신은 다르다. 우리는 비슷하지만, 그 사진틀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넣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소망하며 믿는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차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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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키팅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 사제

1961-1981 스펜서에 있는 요셉 수도원 아빠스

1975년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 운동 시작

1984년 국제 관상지원단 창설

현재 관상지원단 대표, 스노매스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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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기도
2. 큰 잔치의 비유
3. 누룩의 비유
4. 용서
5. 가장 좋은 길
6. 영적 여정의 은유로서의 “유대인”과 “헬라인”
7. 하나님과 춤을
8. 하나님의 내주하심
9.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
10. 은밀한 기도
11. 골방기도의 효과
12. 하나님의 테라피란 무엇인가?
13. 정화의 과정
14. 관상기도의 단계들
15. 시대적 징후에 대한 응답

부록 1: 순수한 기도

부록 2: 센터링 침묵기도의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