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향한 엄두섭 목사의 영성생활의 지침서~


예수의 마음을 닮은 자의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이 바로 영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 영성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다.



이 책은 영성생활에 대한 개론서이자 실제로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실천적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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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운악산에 들어와 15년 동안 나는 내 나름대로의 도연명이나 한산자(寒山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아왔다.
나에게 학위를 주겠다는 학장이 있었다. 그런 것은 개를 주어도 먹지 않는 것이다.
산거하고 있는 나에게 수도원 건물을 지어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좋다”면서 거절했다.
지금 내 주위에는 한산(寒山)과 바위굴과 계곡의 맑은 물, 솔바람, 밤에 우는 소쩍새, 자작나무 숲이 있다.

성 베르나르드는 말하기를, “너희는 책에서보다 산천초목에서 더 위대한 것을 배울 것이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들이 너희 스승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 줄 것이다.
너희들은 바위에서 꿀을 빨아먹으며 돌멩이에서 기름을 짜 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했다.

이세종 선생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진리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거든 천태산(天苔山) 바윗돌 밑에서 배웠다고 대답하여라”고 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하지만 그런 심정으로 산거(山居)를 즐기고 있다.

나는 고요히 합장하고 “예수 성심(聖心)이 되게 하소서”를 염한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하여 내가 생사를 초월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축복받은 것 같고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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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종교의 흥망”에서 인간의 탄생과 성장과 죽음의 라이프 사이클이 잇듯이 종교도 이와 같다고 전재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한 사람의 일생에 출생하는 때, 성장기와 전성기, 그리고 노쇠하고 죽는 때가 있듯이 인간의 문명과 역사에도, 기독교의 역사에도 발생기와 성장기, 그리고 중흥기 및 노쇠기와 죽음의 때가 있다. 기독교라고 해서 영원히 청춘을 유지해 가는 불사(不死)의 종교는 아니다.
이집트 문명은 도도메스 3세, 람메스 2세 시대에 전성을 이루고 사라졌다. 히브리 민족은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전성을 이루고 사라졌다. 페르시아는 고레스 시대와 다리우스 1세 시대에 그 전성을 이루고 사라졌다.
프랑스의 전성기는 루이 14세 때였고,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였다.
기독교는 그동안 여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오다가, 오늘날 유럽 백인들의 사회 속에서 유럽의 교회는 죽었다는 평을 듣는 말로(末路)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의 몰락
지금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는 몰락의 추세에 있다. 서구 세계와 비서구 세계의 근본적인 구조를 볼 때 비기독교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는 세속화되고 허무주의 세력에 굴복하고 있다. 약간 남은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성이나 경건적 면에서 매우 세속화되어 있다.
오늘날 유럽 전체에 옛날 같은 기독교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유럽의 교회는 이미 죽었다고 한다.
유럽 백인들은 일생에 두 번, 결혼할 때와 자신이 죽어서 장례식하는 때에만 교회에 간다고 한다. 독일의 가톨릭 신도수가 20만 명이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교도의 31퍼센트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통계가 있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은 유럽에서 예수가 떠난 지 오래라는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타락한 교회는 하나님의 무덤에 불과하다. 그래서 알타이저는 “신의 죽음의 철학”을 부르짖었다.
청교도의 나라, 세계 선교의 나라로 유명하던 영국은 지금 전체 인구의 13퍼센트밖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도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구 런던의 97개의 교회 중에 주일에 문을 여는 교회는 세 곳밖에 없다. 나머지 교회들은 공장이 되기도 하였고 “팔 것”(for sale)이라고 붉은 페인트로 교회 건물 벽에 써 붙여 놓았다. 기독교 국가인 영국은 중국을 침략하여 아편을 팔면서 성경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서유럽에는 이슬람 교도가 8백만 명이 넘는다. 프랑스에서는 기독교가 몰락한 대신 인구의 5퍼센트가 이슬람 교도들이요, 유럽 모슬렘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영적 진공 상태를 틈타 여러 이단 사교들이 밀려들고 있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 세계에 회교국이 7개 국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세계의 6분의 1이 회교 국가가 되었다.

종교개혁
15세기 말 로마교회 내부의 부정부패와 몰락은 절정에 달했다. 교황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유럽은 두 개 세 개로 분열하고, 교황청은 십자가의 복음보다 르네상스 영향에 더욱 심취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성직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목자라기보다 오히려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자들이었다. 성직자들의 대부분은 공공연하게 첩을 두고 사생아를 낳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그동안 내려오던 로마교회의 전승과 신앙, 그리고 비기독교적인 허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 테두리 밖에서 일으킨 개혁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교회 자체 안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타격을 입어 자기 반성으로 일어난 대항적 개혁이었다. 15세기 말 로마교회 내부의 부정부패와 몰락은 절정에 달했다. 교황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유럽은 두 개 세 개로 분열하고, 교황청은 십자가의 복음보다 르네상스 영향에 더욱 심취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성직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목자라기보다 오히려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자들이었다. 성직자들의 대부분은 공공연하게 첩을 두고 사생아를 낳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그동안 내려오던 로마교회의 전승과 신앙, 그리고 비기독교적인 허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 테두리 밖에서 일으킨 개혁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교회 자체 안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타격을 입어 자기반성으로 일어난 대항적 개혁이었다.

경건주의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은 후 개혁의 열기가 있는 동안은 괜찮았으나 세월이 흘러 그 열기가 사라져 가면서 개혁 교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고, 강단의 설교는 영적 충만함이 없이 굳어지고, 신학자들은 크지 않은 문제로 서로 분열을 계속했다. 교회는 루터의 정신을 배반하고, 냉담한 교리 조문이나 독단적 교의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성경 연구에 태만하고, 깊은 종교적 정서나 고결한 도덕 생활을 멀리했다. 목사들은 신자들의 경건한 생활은 돌보지 않고 교권만 주장하려 했다. 그 결과 신자들은 무지하여 미신에 빠지고 기독교인들의 도의는 퇴폐해 갔다.
이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경향을 염려하여 그 풍조에 반항해 일어난 것이 경건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8세기 초반까지 계속된 유력한 종교 운동이었고, 종교적 정염과 내적 생명을 존중하는 신비 계통이었다. 경건파(Pietism)라는 이름은 그들을 냉소하는 자들이 조롱하는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제2부 “수도원과 영성”에서 기독교의 전통과 영성생활, 특히 수도원 운동을 다루고있다.
하르낙 교수는 수도원을 깊이 연구해 보고 “수도원은 교회가 핍박받을 때 지켜 주고, 세속에 빠질 때 건져 주었고, 이단 사교가 일어날 때 바른 신앙을 지켜 주었다”고 말했다.
중세 교회가 쇠약해지고 암흑해졌을 때마다 위대한 베네딕도, 베르날드, 프란치스코, 어거스틴 등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 바른 신앙을 지키고 도덕적 타락을 막아 주고 깨워 주고 정화시키며 영적 수원지가 되어서 세속 교회에 신령한 물줄기를 대어 주었다.

수도생활, 밭에 감추인 보화
세상에 종교치고 수도원이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개신교는 수도원이 없이 교회와 예배만 가지고 종교생활을 해나가려고 하니 신도들의 영성이 고갈되고, 교회와 신도들이 세속에 빠져 경건을 잃고 교양이 없이 야비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생활과 예배 반복으로만 종교생활을 유지해 가면서 심령의 고갈을 해결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수도생활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예수님 비유에 등장하는 “밭에 감춘 보화”라고 감격했다.
수도원의 기원은 예수님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유대교의 은둔 금욕 고행 단체인 엣세네파는 수도 단체다. 그들은 세상과 가정을 버리고 독신으로 사해 근처 쿰란에 은둔해 성경 사본을 쓰며 흰옷을 입고 수도생활을 했다.
큰 느티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들듯이 백 년에 한 번 몇 백 년에 한 사람 큰 성인이 일어나면 그의 인격의 거룩한 감화를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들로 수도원이 이루어진다.

성인
성인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성총이지만, 인간 편으로 볼 때는 용맹이다. 용맹이란 위로부터 주어진 성총에 대한 절대 신뢰심이다. 결단, 전향, 모험, 비약을 결행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성인을 만드는 것은 죽음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 정신이다. 죽음을 각오하면 성인이 된다. 인간을 영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동기는 죽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어떤 성인에게는 초자연적 능력도 주신다. 그러나 기적이나 초자연적 능력이 꼭 거룩한 성덕을 이루는 원인은 아니다. 초자연적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던 성인들도 많았다.

영성이 무르익던 시대
수도생활에는 혼자서 수도하는 독수도(獨修道)와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하는 공주수도(共住修道, 會修道)의 두 가지 길이 있다.
안토니는 수도생활의 창시자, 독수도자의 아버지, 사막의 교부 혹은 은둔(隱遁) 수도사의 선배로 알려져 있다.
수도원의 첫 무대는 이집트 사막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막이야말로 신(神)을 찾고 수도생활을 하기 위한 이상적인 장소였다. 사막은 비가 오지 않는 곳이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지대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요, 태고의 영원한 고독과 침묵 속에 수도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수도자에게는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사막의 매력이란 것은 불타는 모래 벌판이 아니라 인간의 방해를 받지 않는 심령의 오아시스다. 수도자는 쓸쓸한 사막이 아니면 태고의 침묵이 깃든 한적한 계곡을 애써 찾는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곳이 도심(道心)을 일으키는 곳이다. 묘지 근처를 수도지로 택하는 이들도 있다.

제3부 “영성신학”에서 영성신학에 대한 체계와 이념을 정리하였다.
인간은 영성과 육성의 복합체이다. 사람을 육신적으로 값을 따진다면 소 한 마리 값만도 못하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육이 아니요 영이다. 그것은 인간 생명의 원동력이요 하나님의 기운이다.
영성이란 말을 히브리어로 “루앗”(rûach)이라 한다. 헬라어로는 프뉴마(靈; πνευμα)로서 입김, 숨결, 바람이란 뜻이다. 이 말의 개념의 기원은 창세기 1장 26-27절과, 창세기 2장 7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육체가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영, 즉 영혼만이 진정한 자아(眞我)이다. 하나님을 육으로는 섬길 수 없고, 영성으로만 섬길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영성은 죄악으로 썩어 그 원형을 잃고 겨우 흔적이나 남은 정도인데, 예수를 믿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화(聖化)의 은총을 받음으로 잃은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영성이라 말할 때, 기독교적 영성만으로 규정지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영성이 있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심성(心性)이라고 부른다. 가톨릭에서 영성이란 말을 쓸 때는 완덕(完德), 즉 하나님과의 일치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심성과 기독교의 영성은 같지 않다. 영성의 다양성을 말하게 되면 기독교적 영성의 의미가 잘못 이해될 염려가 있다. 기독교적 영성에도 개신교에서 요즘 수년간 부르짖는 영성은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 잘못된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영성을 더욱 발전시켜라. 세상과 소유욕에서 이탈 수행하면서 육의 욕정을 절제하라. 영성이 매우 발전한 이는 성흔을 받기도 하고, 몸이 부양(浮揚)하기도 하고, 영음을 듣기도 하고, 영감 있는 설교를 해내기도 한다.


제4부 “실천하는 영성”에서는 실천적 영성을 제안한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있으라’(되어지라)고 선포하셨지만,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그것은 육체적인 면이 아니다 영성적 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단지 믿는다는 것, 이신득의로만 안심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에 어울리게 완전에 도달코자 노력해야 한다. 불완전 속에 눌러 앉아 만족하고 있어선 안 된다.
영성신학의 목적은 성화생활과 완덕을 얻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으므로 윤리 면의 실천적 학문이다.
우리가 세례 받고 믿을 때 얻은 그리스도적 생명, 초자연적 생명을 더욱더 발전시키고 완전케 하는 길과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영성신학의 목적이다.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하고 끊임없이 참회하며 영성생활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과의 일치에 더 가까이 이르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어지는 것이라 해서 자기의 영성훈련도 성령께 일임하고 한가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제5부 “지도자의 영성”에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의 상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영감이다
성직자 특히 개신교 목사는 설교하는 일이 주요한 사명인데, 설교의 목적은 학술적 강연을 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타의 영성을 살리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단지 성경을 펴들고 해석하며 강론한다는 형식적인 임무로만 목적을 다해내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다는 설교의 임무는 대단한 것인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예언자의 사명과 같은 것이다. 구약 시대의 종교에 있어서 대표적인 종교가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제사장이요. 또 하나는 예언자들이다. 제사장은 세습적이고 직업적인 종교가였는데, 그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의 영감이 내리지 않았다. 거기 비해볼 때 예언자는 세습적인 것은 아니요, 예언이 직업도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감이 임했다. 그들은 오늘의 설교자들처럼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대로만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좀 몰라도 어지간히 목사 노릇은 할 수는 있으나, 성직자다운 성윤리를 지키지 못하고서는 목사랄 수 없다.
바울은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9)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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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두섭 목사

엄두섭 목사는 1919년 함남 함흥에서 출생, 일제 강점기 말에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으로 평양신학교 2년을 수료, 6.25사변 전에 남하한 후 현재 장신대의 전신인 장로회신학교를1회로 졸업하였다.
목회 생활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수도원 운동을 펼치던 중 은성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저서
수도생활의 향기
맨발의 성자
호세아를 닮은 성자
순결의 길, 초월의 길
성 프란시스 전기
영풍
영맥
기독교 영성의 흐름
한국적 영성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참기독교인의 삶
진동하는 영성
영성의 새벽

영성생활의 요청
영성생활
죽음 뒤에 오는 것
신비주의자들과 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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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종교의 흥망
1. 종교의 몰락
2. 종교개혁
3. 경건주의

제2부 수도원과 영성
1. 수도원 운동
2. 성인론
3. 영성이 무르익던 지대

제3부 영성신학
1. 영성신학
2. 영성 발전
3. 영과 진리로
4. 개신교의 영성

제4부 실천하는 영성
1. 영성생활
2. 영성생활의 대책
3. 영성훈련

제5부 지도자의 영성
1. 설교자의 영성
2. 목회자의 성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