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설교 21: 교회와 그리스도를 향한 신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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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부는 신랑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연인입니까? 신부에게 신랑을 따라갈 자유가 없기 때문에 신랑의 인도를 받아 이끌려 가야 하는 것입니까? 인도함을 받아 이끌려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마지못해 이끌려 가는 것은 아닙니다. 병자들이나 호흡기가 약해서 걷기 어려운 사람들은 인도를 받아 목욕탕이나 식탁으로 이끌려 가는 데 저항하지 않지만 죄수는 법정이나 교수대로 이끌려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끌어 달라고 인도를 요청하는 여인은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신부가 스스로 따라갈 수 없었을까요? 신부가 약하다고 이해해야 합니까? 만일 처녀들 중 하나가 자신의 약함에 대해 불평하면서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면, 우리는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튼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부가 마치 병들었거나 내키지 않는 사람처럼 인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특히 완전하고 비할 데 없이 고결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부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연약하다는 말을 적용한다면, 과연 누구를 건강하고 튼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이 승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말을 한 교회 안에 신랑을 따라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려는 갈망이 가득할 수 있습니까?(골 3:4). 아무리 큰 완전함을 획득한 사람이라도 사망의 몸을 지고 있고(롬 7:24) 악한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어 인과관계의 속박을 받고 악한 충동에 시달리는 한 진리의 관상에 도달하는 일은 영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조금씩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지는 못합니다(계 14:4). 그렇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칩니다. 또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시 142:7)라고 간구합니다. 신부도 번민하면서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아 1:4).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 이 세상살이는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지혜서 9:15)라고 거듭 말할 것입니다.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픈(빌 1:23) 갈망 때문에, 특히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사람들이 신랑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크게 진보하며 안전하게 사랑 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까?

그녀는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3)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보십시오.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그들을 당신에게 굳게 묶어 놓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계속 살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2. 만일 신부가 “나를 당신 가까이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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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신랑의 생활방식을 본받고 그의 덕을 배우고 그의 생활규칙과 비슷한 생활규칙을 고수하며 그의 절제를 어느 정도 획득하는 은혜를 달라고 호소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마 16:24).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신 분이 신부를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따라 걸어가지 않는 한 당신과 결합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할 때에도 당신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 눈물 골짜기를 벗어나(시 84:6) 기쁨이 풍성한 산에서 당신과 연합하게 될 날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주님의 오른쪽에 영원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시 16:11) 주님에게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소유하기 원하지만, 주님의 본을 따르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다스리려 하지만 함께 고난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롬 8:17). 어떤 사람은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민 23:10)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말이 의인들의 종말을 닮기 원했지만, 자신의 인생 초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거부하는 세속적인 사람도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시 116:15)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영적인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죽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실 때에 그 유산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시 127:2-3).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계 14:15). 그러나 선지자는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시 34:21)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주님께 가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눅 22:28)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증인으로 모시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복됩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진리 안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길이요 생명이신(요 14:6) 주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시 16:11).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요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승리했다는 느낌을 가지고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마 19:27)라고 말합니다.

 

3.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고,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항상 따라갔습니다(계 14:4). 주님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라는 것(잠 3:17),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요 8:12)을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공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기’(시 36:6) 때문에 그녀는 주님에게 인도해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주님에게 올 수 없다는 것(요 6:44)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인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시므로(요 5:19)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또한 주님의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녀가 주님의 이끌림을 요청하는 데에는 한층 더 친밀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녀의 인도자와 명령자로(사 55:4) 먼저 보내신 신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도덕적인 삶의 본보기가 되어 덕의 길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녀를 가르쳐 자신을 닮게 하시고 지혜를 나누어주고(사 40:14) 생명과 지식의 율법을(집회서 45:5) 주셨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리실 것입니다(시 45:11).

 

4.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우리의 내면에서 주님 사랑의 불이 식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추위(시 147:17) 때문에 우리는 전처럼 달려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구원자이심을 아는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때 의로운 해가 다시 빛나면서 은혜의 따뜻함이 회복되어 우리는 다시 달릴 것입니다(시 51:14). 구름처럼 그분을 가려 보지 못하게 하던 곤경이 지나갈 것이며,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산들바람이 기름을 녹일 것이며, 향기가 대기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공중에 부드럽게 퍼진 향기가 이끄는 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열정이 회복됨에 따라 지금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무기력한 상태가 사라질 것이며, 이제 우리에게는 인도하심이나 이끌림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향기의 자극을 받아 자발적으로 달릴 것입니다. 지금 나를 주님에게로 인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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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갈 5:18) 사람은 항상 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욥 14:2). 또 항상 쉽게 진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인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하라고(빌 3:13) 가르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때로는 무기력하고 때로는 태평스럽게 걸어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내적 경험이 내가 표면적으로 묘사한 것을 반영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냉담과 미온적인 태도와 피로에 짓눌린다고 느낄 때에 비겁함에 굴복하거나 영적 진리 탐구를 중지하지 말고, 아가서의 신부처럼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의 인도하심을 요청하십시오. 그리하면 은혜의 영향을 받아 다시 삶의 활력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달리면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그것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서 마치 하나님의 선물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소유한 듯이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주님이 갑자기 도우심과 선물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낙심하여 크게 불행할 것입니다. 형통할 때에 “내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고 자랑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시 30:6). 그렇지 않으면 시편 기자처럼 슬퍼하면서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라고 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자의 충고를 따르려 할 것입니다: 행복할 때 불행을 잊지 말고, 불행할 때는 행복하던 때를 잊지 마십시오(집회서 11:25).

 

6. 무상하게 사라지는 행복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지자처럼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시련을 당할 때에 위로를 받으며 신부처럼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겠습니다”(아 1:4)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불행할 때에 소망을 유지할 수 있고 행복할 때에 선견지명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며, 영원한 가치관의 지원을 받는 사람의 자세로 행복한 날이나 불행한 날의 우여곡절을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본래의 계획에 따라서 새로워지고 재형성된다면, 어지러운 세상의 변덕스러운 사건들과 결점들 가운데서도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모양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약 1:17).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에(요일 4:17) 불행할 때에 실망하지 않고 행복할 때에 방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주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창 1:26) 이 고귀한 피조물은 시들어가는 세상을 닮는 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살면서 지금도 자신이 최초의 영광스러운 권위를 다시 획득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자신이 피조될 때에 지녔던 형상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마음을 새롭게 하려고(롬 12:2) 노력합니다. 당연히 이 목적은 만물이 참된 본래의 형상 안에서 그의 유익을 위해 협력함에 따라(롬 8:28) 그를 위해서 피조된 세상을 바람직한 관계의 변화에 의해서 그와 일치하게 만듭니다. 만물은 자신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 피조되었음을 깨닫고 타락의 흔적을 완전히 벗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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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외아들이 자신에 대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신 말씀은 모든 형제들, 아버지께서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미리 아시고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정하신 사람들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롬 8:29). 그러므로 만일 내가 땅에서 들린다면,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서 만물을 내게로 이끌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모양을 입었다면 그 형제의 말을 내 말로 취해도 경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창 27:1-40). 그리스도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 세상의 부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하늘나라의 선물만 소유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속이 하늘나라의 것들만 언급한다고 해도 그것들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되 아무것도 없는(고후 6:10) 사람의 정신으로 소유합니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탐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되, 구걸하는 것을 얻는 불행한 거지들과 같지 않고 주인들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은 보물창고입니다. 유익한 것이든지 불리한 것이든지 모든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그의 선을 이루는 데 기여합니다(롬 8:28-29).

 

8. 구두쇠는 거지처럼 세상의 재산을 동경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당당하게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전자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거지요, 후자는 그 초월함 때문에 참된 소유자입니다. 만족을 모를 정도로 세상의 부귀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함으로써 세상의 재물을 주고 하늘나라를 얻은(마 19:21)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 보십시오. 그들의 행동이 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 질문해 보십시오. 분명히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에게 자신이 인정하는 행동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 보십시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탐욕이 그의 안주인이 되어 그러한 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는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들이 정말로 당신의 것이라면, 그것들을 유익하게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물건과 하늘나라의 것을 교환하십시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돈의 주인이 아닌 노예라는 것, 주인이 아닌 관리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돈을 대하는 태도는 종이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행복할 때 행복해야 하고, 슬퍼할 때 슬퍼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지갑이 두둑할 때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지갑이 얇아지면 기가 죽습니다. 지갑이 비면 불행하고, 가득 차면 기뻐하거나 교만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구두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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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주제에 대해 제대로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운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시 90:12)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아는(빌 4:12) 신부의 자유와 지조를 본받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부는 자신을 이끌어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돈이 아닌 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은혜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위로를 받으므로, 자신이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9. 그녀는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고 말합니다.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가는”(아 2:8) 거인을 잡으려고 뒤쫓아가는 사람을 인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놀라운 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은 속히 달립니다(시 147:15). 그녀는 달리는 그분의 걸음을 쫓아갈 수 없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시 19:5) 분의 신속함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힘으로는 그분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를 이끌어 인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치고 약해졌습니다. 나를 버려두지 말고 인도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고 낯선 연인들을 따라갈 것이며, 목표 없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인도해 주세요. 나의 미온적인 태도를 방관하시고 나를 거짓된 안전감에 빠져 있도록 방치하시는 것보다는 나를 위협하여 두렵게 하시거나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인도해 주시는 편이 낫습니다. 나의 뜻을 무시하더라도 나를 인도해 주시고 유순하게 만들어 주세요. 게으르지만 나를 인도하여 달리게 해주세요. 장차 내가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날,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전속력으로 함께 달릴 날이 올 것입니다. 비록 내가 홀로 인도함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나는 홀로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녀들이 나와 함께 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보조를 맞춰 함께 달릴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의 향기를 맡으면서 달리고, 처녀들은 나의 본보기를 보고 격려를 받으면서 달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당신의 향내를 맡으며 달릴 것입니다.” 신부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처녀들은 신부를 따르므로(고전 4:16), 그녀는 단수형으로 말하지 않고 복수형으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10. 그녀가 인도해 달라고 부탁할 때에 처녀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왜 “우리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까? 처녀들은 인도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신부만 인도함을 필요로 했습니까? 복되고 아름다우신 자여, 이렇게 구분한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신부가 왜 “우리”라고 말하지 않고 “나”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은 우리가 이러한 호의를 받는 것을 부러워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혼자서 신랑을 따라 여행하기를 원했다면 그 직후에 처녀들이 당신과 함께 달려갈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복수형으로 “우리가 달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하려 했다면, 왜 단수형으로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영성생활을 하는 동안 위로부터 징계와 위로라는 두 가지 도움을 기대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징계는 외적인 것을 통제하고, 위로는 내면에서 작용합니다. 전자는 오만을 억제하고, 후자는 신뢰를 고취해 줍니다. 전자는 겸손을 낳고, 후자는 소심한 사람들을 튼튼하게 해줍니다. 전자는 사람을 신중하게 해주고, 후자는 경건하게 해줍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주며(시 34:11), 후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라는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으로 그 두려움을 완화시킵니다.

 

11. “우리는 유혹과 시련을 당할 때에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내면에 위로가 가득하여 향내 나는 공기를 호흡할 때에 우리는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렵고 근엄한 일을 만날 때면 건강하고 튼튼하고 완전한 나 자신에게만 그것을 국한시켜 단수형으로 ‘나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즐겁고 상쾌한 것을 연약한 당신과 함께 나누며 ‘우리가 달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처녀들이 여리고 약하며 유혹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나와 함께 인도함을 받기보다 나와 함께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시련에 동참하기보다 나의 위로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고후 1:7).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지쳐서 뒤에 처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신랑이시여, 당신이 징계할 대상은 나입니다. 나를 시험하시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며 인도해 주십시오. 나는 채찍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참고 견딜 만큼 튼튼합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함께 달리겠습니다. 나 혼자 인도하심을 받고, 우리가 함께 달리겠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신뢰하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향내를 맡고 달리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풍성한 자비에 소망을 두고 달려갑니다. 우리는 자원하여 달릴 때에도 사람의 뜻이나 노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달렸습니다(시 45:7). 자비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다시 달리겠습니다. 당신은 장사의 힘을 가지고서 자력으로 달리실 수 있습니다(시 19:5).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항내를 맡을 때에만 달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으므로(시 45:7) 당신은 그 기름부음 덕분에 달리시며, 우리는 그 기름 냄새를 맡으며 달립니다. 당신은 충만함을 즐기며, 우리는 향기를 즐깁니다.”

이제 신랑의 기름에 대한 설교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매우 탁월한 것이므로 간략하게 다루어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원하여 전한 교훈들을 축복해 주시며 주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이루어주시기를 교회의 신랑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

 

                차례               

설교 21 교회와 그리스도를 향한 신부의 사랑

설교 22 신랑의 네 가지 기름과 네 가지 주요한 덕

설교 23 왕의 방

설교 24 비방, 그리고 사람의 의

설교 25 신부가 검지만 아름다운 이유

설교 26 게달의 장막과 신부의 검은 피부

설교 27 솔로몬의 휘장과 신부의 아름다움

설교 28 신랑과 신부의 검음과 아름다움

설교 29 교회와 공동체 내의 불화

설교 30 신비한 포도원과 육의 구별

설교 31 하나님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

설교 32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

설교 33 추구해야 할 목적/신비한 정오/피해야 할 시험

설교 34 참된 겸손

설교 35 신랑의 책망: 신부의 두 가지 무지

설교 36 지식 습득

설교 37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지식과 무지

설교 38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절망으로 이어진다/신부의 아름다움

설교 39 마귀와 그 군대

설교 40 신부의 얼굴

설교 41 지성, 믿음, 관상

설교 42 사랑의 견책/두 종류의 겸손

설교 43 그리스도의 고난

설교 44 영혼의 아름다움/영혼과 말씀의 대화

설교 45 열정의 포도주와 자비의 기름